"知之者 不如 好之者 好之者 不如 樂之者"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공자의 논어, 옹야 편)
공자의 이 문구는
아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혹은
어떤 일이던 즐겁게 하는 자를 당할 수가 없다 라는 의미로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후자의 의미가 간혹 성공신화에 목 맨 한국인들에게,
특히 효율의 극대화에 몰두하고 있는 회사 경영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건지
서점가의 자기 계발서, 경영관련 책에도 공자의 이 가르침이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2500년전에 말한 이 귀절의 함의를 좀더 넓혀본다면
이 말은 전문적인 일을 하기 위한 자세, 혹은 단계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말하자면, 어떤 일을 제대로 수행하는 위해서는
그 대상을 머리로만(언어를 통해서만) 이해하고 행하는 것을 넘어
그 일 자체에 흥미와 애정을 가져야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끌어들여
스스로 즐기고 향유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
그때 비로소 그 일을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릴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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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미술이라고 말하는 공예는 삶의 공간에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
전시장에서 보는 시각적 판단으로는 그 가치의 일부만을 알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예품을 회화나 조각처럼, 화이트큐브속에서 벽에 걸고, 전시대 위에 하나씩 올려놓고
그 가치를 판단하게 하는 일은 공예가들에게 근본적으로 불리한 게임이다..
공예품은 역설적으로 전시장을 떠나는 순간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날의 공예가 과거에 비해 비록 기능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생활과 가까운(가까워야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가치는 작품의 독립적인 시각적 이미지나 상징성 뿐 아니라,
의식주의 구체적 공간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그 공간을 구성하는 다른 사물들, 구성 요소들과
어떻게 조화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몸에 어떻게 접촉되고 사용되는가에 따라 매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당연하게도 시간이 경과될수록 정확해진다.
공예품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가 보다 높은 경지의 작품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는 그 대상이나 분야를 학문적으로 공부해야 함을 물론,
생활속의 사물들- 그것이 공산품이건, 공예품이건, 미술품이건- 을 유심히 관찰해야 하며
그들을 자신의 몸을 통해 사용하고 향유하는 체험을 누적시켜야 한다.
그것은 간혹 있는 이벤트가 아니고 지속적이어야 하며 일상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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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고 음미한다는 것, 즉 향유는 결코 소모적이거나 결과적인 일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나 일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방편이며,
그것이 다시 그 체험의 주체로 하여금 좀더 높은 차원의 일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이 된다는 말이다.
공예가들 역시, 뛰어난 생산자가 되기위해서는 뛰어난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