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분야에서 '장식'이라는 말처럼 오용되거나 의미가 축소된 경우도 드믈 것이다.

특히 '장식적'이라고 표현할 때 그러하다.

가령 어떤 화가에게 "'당신 그림은 참 장식적이에요" 라고 말해 보자.

상대는  이 말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좀더 완곡하게 말한다면 어떨까?

"당신 그림에는 장식성이 있어서 저는 좋아요'(사실 얼마나 좋은 표현인가?)

상대의 반응은 다를까.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장식 혹은 장식적이라는 말은 미술품에서의 구성요소 혹은  미적 특징이나 덕목이 아니라

예술성, 창의성을 깍아내리는 요소나 부정적 표현으로 쓰이기 일쑤이다.

물론 오늘날의 개념미술, '순수하다'는 '순수미술일수록 그러하다.

 

공예나 디자인분야에서도 장식이라는 말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며 혼동스럽다.

미술의 역사에서 19세기까지 공예를 포함한 실용미술 전체를(신생의 산업디자인 분야까지도)

장식미술decorative art로 통칭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말이 가진 의미의 변화와 곡해는 다분히 근래에 생긴 현상이다.

아직 우리 시대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20세기 서구의 모더니즘 디자인은

탈장식을 지향하며 절대적인 신조로 삼았다

적을수록 많은 것이다Less is More’ 라는 기준에서 장식은 불필요한 부가적인 요소로 치부되었으며

심지어  장식은 죄악이다라고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은 천명했다.

 

그러나 로스가 혐오하고 배격한 19세기 유럽의 장식이 얼마나 과잉이었으며,

사물 본연의 기능을 압도하는 지나친 것이었는지를 안다면 그의 진의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며, 

같은 이유로, 이 발언이  21세기까지 의미를 지닐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수 있다.

 

장식이라는 개념, 이 행위 속에는 여러 층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장식의 요소인 문양은 애초 일정한 의미를 담지한 기호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문자로부터, 외부 형상으로부터 추상화된 문양은

인간이 만든 각종 사물, 건축물의 각 세부와 표면에서 의미를 기록하고 전하는 일종의 기표였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경우에도

문양은 시각적 형상 자체로, 혹은  더욱 추상화된 패턴이나 무늬로 변형되면서

그것이 적용된 바탕과 어울리며 그 사물 혹은 공간을 시각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미적 기능을 담당해 왔다.

이와 같은 장식행위는 대상을 인간화하는 과정이라고도 할수 있다.

장식을 통해 대상의 크기와 공간은 휴먼스케일로 분할되거나 축소되기도 하며

인간의 세계속으로 편입된다.

빈 공간속에 장식적 모티프들을 가미함으로써 사물과 인간 사이의 정서적 교감을

가능케했던 장식행위는 인간이 외부대상에 가하는 '휴먼터치' 였던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장식성', '장식적' 이라는 의미가  문양과는 별개로 논의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문양 없이도 어떤 사물이나 미술작품이 장식적일 수 있으며 

장식적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장식 혹은 장식적이라는 의미는

한 사물이 그것의 주변과 어울리거나 그 주변을 돋보이게 한다는 의미이다.

한 사물 안에서 문양이 몸체를 장식하듯

하나의 사물 자체도 주변의 공간 혹은 사물과 어울리거나 그것을 돋보이게 꾸밀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몇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그림도

실내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 공간을 장식하는 미술품이 될수 있으며,

문양이 전혀 없는 단색의 도자기도 그것이 놓이는 환경속에서 주변의 시각적 요소들과 관계하며

그 공간을 꾸미고 풍요롭게 만드는 장식적 사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장식성을 지닌 사물이 주변과 만드는 시각적 관계는

조화의 관계일수도 있으며, 긴장의 관계, 혹은 대비의 관계 일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시대의  작품으로서의 장신구art jewelry는

그것의 환경이라고 할수 있는 신체와의 관계에서

전통적인 조화 뿐 아니라  긴장, 대비,  파격 등의 다양한 관계맺기를 시도한다.

 

한 사물이 만드는 주변환경과의 다양한 관계를  '콘텍스트context' 라고 표현한다면

장식은 시각적이며 심리적인 콘텍스트만들기 라고도 할수 있다.  

 

장식성에 대한 몰이해를 공공장소에 설치되는 미술장식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왜냐하면 이 공공미술의 목적은 명칭에서 드러나듯

도심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장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몰이해 혹은 반감의 표출인지

우리의 도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미술장식품 속에는 

미술은 있을지 모르지만  장식성’은 결여되어 있다

이들이 도심을 아름답게 만들 리는 없는 것이다.

 

작품의 내용도 훌륭하지만, 주변의 공간과 어울리고 조화로운,

그래서 그 작품 때문에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장식성이 있는 미술품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장식, 장식성, 장식적 이라는 용어가 억울한 누명을 벗고

본연의 의미을 회복해야한다.

 

장식이 없는 세상은  우선 삭막하고

또한 무질서한 세상을 의미한다.